나는 올해 이뤄놓은게 없다고 생각해서 회고록을 적지 않으려고 했다.
그래도 여태 경험을 비추어보아, 모든 일엔 발자취를 남기는게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2020년 회고록을 쓰기로 했다.
좋은 일보단 안좋은 일이 대부분이었지만 하반기에 부쩍 늘어난 행복한 날들이 2021년에도 이어지면 좋겠다.
(+ 다른 분들이 쓰시는거에 자극도 엄청 받았다!)
1월
수습 기간 없이 들어간 회사였지만 3개월차 신입이었다. 다들 연봉 협상한다고 불려갈 때 나는 사장님 두 분과 면담하며 인생 이야기를 들었다. 이제 나도 학생이 아닌 '프로 디자이너' 로써 일한다는 자각을 가지고 있으라며. (졸업도 안했는데..)
그렇게 온갖 스트레스를 받으며 1인 디자이너로 일을 했으나 사실 오래 있으려고 들어간 회사는 아니었다. 알바보단 사회경험을 쌓는게 낫겠지 싶어 학교 탈출용 + 서울 자취비용을 벌러 들어간 곳이었다. 집이랑 가까워서 매우 좋았지만 나 대신 있었어야 할 디자이너가 2주만에 탈주한데엔 이유가 있었겠지 .. 그렇게 다음 회사에 이직할 때를 대비 해 사설 학원을 알아보기 시작했다.
2월
디자이너들 사이에서 알아주는 학원을 뽑으라면 대개 디자인나스, 홍시디자인, 아카데미정글, 리메인을 뽑는다. 국비 학원도 고려해봤지만 긴 과정들은 대게 오전부터 오후까지 시작하는 곳이 많아 직장을 다니는 나에겐 맞지 않았다. 그리고 1, 2군이상 에이전시에 가는 것을 목표로 했기 때문에 이왕 다닐거 돈을 들여서라도 좋은 학원을 다녀야겠다고 생각했다.
지방인인 나는 가까운 부산에 디자인나스가 생겼다는 것을 알게 돼, 2월에 대기를 신청했다. 최소 한 달 기다려야 하는 건 알고 있었고 회사를 마치자마자 가도 최소 1시간 10분이 넘는 거리여서 등록할 수 있는 타임이 한계가 있었기에 대기가 오래 걸릴 것은 감안했다.
회사 일은 반복적인 업무에 루즈하면서도 긴장됐고 제대로 된 기획 없이 내려오는 일방적인 소통을 감내 해야했다. 그렇다고 다른 직원들과 사이가 좋은 것도 아니었으며 자꾸만 엇나가는 일들이 많아져 스트레스의 연속이었다.
3월
생각보다 빨리 학원에서 연락이 와, 나는 3월 말부터 주 2회 디자인 나스를 다니게 되었다. 그때부터 하루라도 주말(토요일)반이 있는 것에 감사하며 수요일엔 퇴근 후 달려가서 부산행 버스를 탔다.
그래도 15분씩 지각을 할 수 밖에 없었지만 아직은 재밌었기에 괜찮았다. 초반엔 기초적인 스킬을 다지는데 할애 했기 때문에 그때까진 여유가 있었다. 나름 배운 지식들을 회사일에 적용시켜가며 소스도 없는 작업물에서 퀄리티를 올려보고자 했다. 그러나 회사를 다닐 수록 자꾸 '난 왜이렇게 사회생활을 못하지' 라는 생각을 떨쳐낼 수 없었다.
4월
학원에선 제대로 된 페이지를 만들어가기 시작하며 3-4일에 한 번 밀도있고 퀄리티 있는 결과물을 가져왔어야 했다. 23년 평생 습관처럼 해오던 벼락치기를 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회사에서 과제를 할 순 없었고 밤새는 일이 잦아졌다. 손은 빠르지만 뭘 하든 시작하기까지 많은 시간을 쏟아붓는 나에겐 두 가지 일을 하는 것이 벅찼다.
결국 회사 일에 헤이해져 정신놓고 일하다 실수를 하게 됐는데 이게 계기가 돼서 퇴사 후 계획을 짜놓고 있던 나는 홧김에 그만두겠다고 했다. 거의 한 달가량 고민했으니 홧김은 아니지만 어쨌든 마음만은 그렇게 가벼울 수가 없었다. 6개월을 못채웠지만 자발적으로 나가는 거였으니 좋게 얘기하기도 싫어 실업급여는 생각도 안했다. 학원에 집중 할 수 있게 돼서 좋을 뿐이었다.
5월
집중해서 학원을 다니기로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진도가 느려졌다. 좋은 결과물을 내려면 많은 시간을 들여 스크랩하고 보고 느껴야했지만 그러지 못했다. 작업을 하면서 내가 봐왔던 획기적이고 자유분방한 디자인과는 다르게 뻔하고 올드한 결과물만 내는 나에게 화났다. 자꾸만 마음 속 구석 언저리에 '내가 디자인을 좋아하는게 맞는걸까?', '나는 어느정도 수준까지 올라갈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이 생겨났다.
사실 정답은 알고 있었다. 자만하지않고 더 신경쓰고 더더 공부했으면 됐다. 모자란 점이 눈에 들어와도 이정도면 얼추 넘어가겠지 하지 말았어야했다. 꼼꼼히 시간과 정성을 들여 작업했어야 했다. 벼락치기로 일정 수준만 나오면 넘어가는 일을 반복하지 말았어야했다.
학교 다닐 때도 적당히 좋은 기획, 적당히 좋은 퀄리티로 내가면 교수님들은 날 크게 터치하지않고 잘하네, 정도로만 넘겼다. 차라리 못한다고 꾸짖으면 발전하는 모습이라도 있을텐데 그게 불만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성장 하는 속도는 중요치 않았고 내 비틀린 재능과 모자란 열정만이 문제였던 것 같다.
자꾸 핑계를 대며 학원을 가지 않으려하는 일이 잦아졌다.
6월
원인은 나에게 있음에도 무력함과 우울감만 늘어나 한 달 8번 있는 수업의 3~4번 가량을 빠졌다. 중요한 포트폴리오 수업이 다가올 수록 내 실력에 대한 스트레스로 압박감만 심해졌고 자책만 늘어났다. 내 주위 환경도 한 몫했다. 자꾸 옆에서 디자인에 대한 비난만 늘어놨다.
슬슬 웹 포폴을 준비하면서 코딩 이야기가 나오자 학교에서 제일 재밌게 했던 웹디자인 강의가 떠올랐다. 내가 원하는대로 통제가능하며 결과에 답이 정해져있을 것만 같은 코딩이 다시 하고 싶었다. XD, Figma 등의 프로그램의 도움을 받지않고 직접 코딩 해 동작을 구현하고 싶었다. 그때서야 깨달았다. 난 쇼핑몰 디자인이 즐거웠던게 아니라 동작하는 웹 자체에 빠졌었다는 것을.
7월
안그래도 하고 싶은게 생기면 그것만 보고 달려가는 난 이미 흥미가 떨어진 디자인을 하자니 너무 하기싫었다. 지금이라도 그만둬야할지, 부은 돈이 아까워서라도 조금 더 다녀서 웹 포폴을 만들어야 할지 고민하며 이유모를 우울한 날이 많아졌다. 20살 때의 경험을 비추어보아 빠른 결정만이 답인 것 같아 학원을 그만두었고 약 8개월 간 팽팽한 고무줄처럼 당겨져있던 나는 늘어나버린 채로 우울증의 바다에 던져졌다.
그 뒤 쉬자고 생각 했음에도 제대로 쉬질 못하고 알바를 하려했으나 면접 전화 한 통 걸지도 못한채로 집 밖을 못나가게 되었다.
우울증으로 병원을 가볼까 했지만 그것마저 발걸음이 안떼져 포기했었다. 물론 주변사람들에게는 나중에서야 알리게 됐다.
8월
10일 모자라서 실업급여 조건도 안되고, 청년구직활동지원금을 넣었는데 예상외로 가족소득이 걸려서 심사에 떨어지고 자꾸 계획했던 일들이 취소됐다. 어떻게 해야 알바없이 다닐 수 있을까 머리만 굴렸다. 일할 자신이 없었다. 와중에 운전면허 기능시험을 친지 1년이 되어가고 있어 유효기간 일주일을 남겨놓고 도로주행 등록을 했다. 부모님 돈으로 등록한 학원인데 내 우울증따위로 날려먹기 싫었다. 꾸역꾸역 기어나가서 시험을 쳤고 신나게 달리다 정지선을 밟아버려 떨어졌다. 그런데 기분만은 너무 좋았다. 왠지 다음엔 붙을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과 함께 차에 대한 공포증도 조금 줄어들었고 자신감도 생겼다.. 그렇게 3일 뒤, 딱 1년째 되던 날 재시험을 쳐 95점으로 합격했다.
면허증을 받아오는 길에 내가 올 해 한가지라도 해냈구나 싶어서 엄청 기뻤다. 그렇게 다시 공부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국비 학원을 알아보기 시작했다. 사실 java나 코틀린이 배우고 싶어 백엔드 과정을 들어갈까 했는데 프론트엔드를 목표로 했기에 맞지 않겠구나 싶어 바로 개강하는 uxui 웹퍼블리셔 강의를 듣기로 했다. html, css를 조금 더 탄탄하게 쌓고 싶었다.
9월
국비 수업을 시작했다. 9월 내내 기본만 배워 지루했지만 코딩을 한다는 사실이 너무 좋아서 오후시간만 기다리고 있었다. 내가 몰랐던 부분들도 알 수 있던건 좋았다. SNS활동도 했다. 조금이라도 관련 소식을 자주 접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지식 확장이 있지 않을까 해서였다.
이때 친해진 지인을 통해 2020헤이스타트업박싱데이 행사를 알게 됐다. 디자인을 하고싶어서 들어갔던 것은 아니고 혼자서 브랜딩을 열심히 하는 열정이 너무 신기하고 멋져보여서 행사참여가 하고싶었다. 기획은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알고 싶기도 했고 협업도 해보고 싶었다. 1인 디자이너로 들어갈 뻔 했지만 다행히 경력 많은 디자이너님과 함께 하게 되었다. 전 회사에서도 사수없이 일했던 나에겐 일반적으로 현업에서 어떻게 일 하는지 지켜볼 좋은 기회였다.
10월
학원에선 2일에 한 번 작업물을 만들어야했는데 디자인적인 스킬은 늘어도 이론과 경험이 늘진 않겠구나 싶었다. 이래서 국비학원이 웹디자인 & 웹퍼블리셔 양성소로 불리는건가 싶기도하고 반대로 감각있는 사람들의 성장을 지켜보는 재미도 있었다. 이게 재능의 차이구나 생각하며 역시 디자인을 하지 않길 잘했다는 생각만 들었다.
수업은 코딩 비중이 점점 높아져갔지만 그만큼 못따라오는 사람들도 많았고 자꾸 수업을 방해하는 소음에 신경이 곤두섰다. 좋은 사람들을 만나서 너무 행복했지만 집에 오면 거진 오후 8시였고 개인 공부를 하기에 시간이 너무 모자랐다. 최신 기술을 배우지 않는 학원 커리큘럼과 생각보다 너무 빡센 행사 진행에 정신과 몸이 너무 힘들었다.
11월
결국 프론트엔드 개발자가 되기위해선 전혀 다른 길을 걸어야겠구나 싶어 중도하자 하게 되었다. 시간낭비를 한게 아닌가 싶었지만 이전보다 빠른 결정을 내렸기에 겸허히 받아들이고 어떻게 공부를 해야할지 고민하는 시간을 가졌다.
중간중간 멘토들의 도움을 받아 js를 접했지만 어떠한 이론없이 코딩부터 하려니 배우는 순간순간엔 원리와 구조정도는 이해가 갔지만 막상 혼자 해보려니 머리가 새하얬다. 또, 웹퍼블리셔로 먼저 취직을 하는게 우선일지 아니면 오랜 기간 취준을 해야할지 계속해서 망설여졌다. 빨리 자취를 하고싶은 욕망이 너무 커서 탱자탱자 놀면서 시간을 보냈다. 이번엔 제대로 된 휴식이었다.
12월
12월 말이 돼서야 겉햝기가 아니라 제대로 배워보자 싶어 온라인 스터디도 참여했고 이론공부도 조금 했으며 인강도 듣기 시작했다. 11월엔 구름 속에서 눈가리고 헤엄치는 기분이었는데 하나하나 예제를 풀고 결과물이 보이니까 지금은 너무 재미있다. 디자인은 싫은게 아니었고 오히려 너무 좋았지만 분야가 조금 달랐던 것이었으며 내가 코딩을 잘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이젠 안놓고 끝까지 잡기로했다 !!
스터디도 핵불닭맛이고 모각코원과 함께하는 쇼핑몰 프로젝트도 핵불닭맛이고 방송대 편입도 험난하겠지만 요즘 하루하루가 날 응원해주는 사람들덕에 너무 행복해서 이겨낼 수 있을 것 같다.
올해 내 목표는 힘든 상황을 회피하지 않고 부딪히기다!! 내년 회고록에서 내가 디(자인하는)(개)발자가 되어있으면 한다.